화이자는 내부 조정에 집중, 파라오 슬롯는 '디-리스킹' 전략 이어가
글로벌 제약사들이 인수합병(M&A) 전략을 공개하고 있다. 화이자(Pfizer)는 100억 달러 이상M&A 자금을 책정해 놓고도 대형 인수를 피하는 신중한 태도다. 지난 몇 년 간 공격적인수를 해왔다면, 이번엔 내부 구조조정에 더 집중하는 모습이다. 파라오 슬롯(Roche) 역시 불확실성이 높은 프로젝트를 과감히 정리하는 한편, 빠르게 개발할 수 있는 신약 후보물질과 희귀질환 치료제에 집중하며 신중한 선택을 이어가고 있다.2025년, 글로벌 제약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경쟁력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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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자, 대형 인수 어려워… 내부 재정 안정화에 파라오 슬롯
화이자는 올해 100억~150억달러 규모의 M&A 자금을 운용할 계획이지만, 대규모 거래보다는 중장기적인 파이프라인 보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앨버트 불라(Albert Bourla) 화이자 대표는 "단기 수익보다전략적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며, 대형 인수보다 연구개발(R&D) 투자 중심의 접근을 강조했다.
이는 최근 몇 년간 화이자가 추진했던 공격적인 인수 전략과대조적행보다. 화이자는 2023년 430억달러를 투입해 시젠(Seagen)을 인수하고, 2022년54억달러에 글로벌 블러드 테라퓨틱스(Global Blood Therapeutics)를 인수하며 대형 M&A를 이어갔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실질적인 성과 점검과 자산 정리가 불가피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발표된 실적 조정을 통해 대형 M&A 이후의 재정적 부담이 명확히 드러났다. 화이자는 시젠에서 도입한 B4-H7 타깃 항체-약물 접합체(ADC) '펠메타투그 베도틴(felmetatug vedotin)' 개발을 중단하며 10억달러의 감액 손실을 기록했다. 또 다른 ADC인 '디시타맙 베도틴(disitamab vedotin)'에서도 2억달러의 손실을 반영했다. 총 29억달러 규모의 손실을 감안해, 화이자는 인수 자산의 효율성을 재평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비용 절감과 부채 감축이 화이자의 핵심 과제가 되고 있다. GSK와 공동 운영했던 소비자 건강 부문 헤일리온(Haleon)의 지분을 일부 매각하며 추가 자금을 확보하는 등 재무 구조 개선 작업을 진행 중이다.
화이자 측은 올해 대형 M&A는 어렵겠지만, 필요할 경우 비즈니스 개발(BD) 차원의 유연한 투자는 가능할 것이라고 밝히며, 대형 M&A는 2026년 이후로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파라오 슬롯(Roche), 2025년 '저위험'M&A와 '효율적 포트폴리오'집중
파라오 슬롯는 대형 인수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투자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M&A 패턴을 살펴보면, 파라오 슬롯는 성공 가능성이 높은 신약 후보물질을 빠르게 확보하기 위해 전략적 인수를 활용해왔다. 단순한 기술 확보가 아니라, 개발 속도를 단축할 수 있는 신약과 시장에서 빠르게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은 자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GLP-1/GIP 이중작용제 및 TL1A 타깃 항체 확보다. 파라오 슬롯는 2023년 31억달러를 투입해 카못(Carmot)을 인수하면서 항비만·당뇨 시장의 핵심 타깃으로 부상한 GLP-1/GIP 이중작용제 및 경구용 GLP-1 작용제 파이프라인을 확보했다. 같은 해 72억5000만달러를 들여 텔라반트(Telavant)를 인수하며, 면역질환 치료제 중 주목받는 타깃이었던 TL1A 계열 항체 'RVT-3101(RG6631)'을 손에 넣었다.
특히 TL1A 계열 항체는 머크(Merck)와 사노피(Sanofi)도 개발을 본격화한 분야로, 경쟁사들이 뛰어드는 상황에서 신속한 선점이 중요한 전략적 요소였다. 파라오 슬롯는 이에 발맞춰 RVT-3101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으며, 현재 궤양성대장염(UC) 치료제 3상 임상을 진행 중이다. 아토피피부염(AD) 2b상과 비알코올성 지방간염(MASH) 1b상도 올 1분기 내 착수할 예정이다.
파라오 슬롯가 집중하는 또 다른 분야는 희귀질환 치료제다. 희귀질환 치료제는 일반적인 대중 질환 치료제보다 개발 속도가 빠른 경우가 많다. 이는 임상시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환자 모집이 어려운 대신 신속한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FDA와 EMA 같은 규제기관은 희귀질환 치료제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희귀의약품 지정(Orphan Drug Designation, ODD), 패스트트랙(Fast Track), 혁신치료제(Breakthrough Therapy Designation) 등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 승인 속도가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을 고려한 파라오 슬롯의 대표적인 인수 사례가 포세이다(Poseida) 인수로 보여진다. 파라오 슬롯는 작년 15억달러를 투입해 포세이다를 인수, ODD 지정을 받은 다발골수종(MM) 치료를 위한 동종 유래 CAR-T 치료제를 확보했다.파라오 슬롯는 희귀질환 치료제의 빠른 개발 속도를 적극 활용해 시장 진입을 가속화하려는 전략을 추진 중인 것으로 해석된다. 올해도 파라오 슬롯는 이와 같은 저위험(de-risked) 자산 및 미충족 의료 수요가 높은 분야에 집중하는 전략을 이어갈계획이다.
빠른 개발이 가능한 신약에 집중하는 한편, 파라오 슬롯는 불확실성이 높은 프로젝트를 과감히 정리하는 작업도 지속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TIGIT 항암제 '티라고루맙(tiragolumab)'의 임상 중단이다. 파라오 슬롯는 기존에 진행하던 네 개의 중·후기 임상시험을 중단하고, 일부 3상 시험만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경쟁사들도 TIGIT 항체 개발을 중단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파라오 슬롯 역시 더 이상의 개발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초기 개발 단계에 있던 후보물질 다섯 개도 추가로 정리했다. 이는 연구 역량을 보다 유망한 프로젝트로 집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단순히 신약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인 신약’에 집중하는 것이 파라오 슬롯의 핵심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