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체리 스토리 [13]

"그런게 아니라 너무 많이 사랑해서 너무 무거워 진거 아니겠니. 난 아무렇지도 않아, 사랑한 적 없어서" 라고 말하는 친구의 웃음과 함께 맞이한 설 명절 바카라!"여러 존재 계층에 의한 인과의 과잉 결정(Overdetermination)이 초래한 문제들이 아닐까" 싶은 만큼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공간을 떠나, 설 명절을 보내기 위해 충주 시댁으로 출발한다. 앞의 이미지가 이번 설 바카라에 만난 극강의 귀염둥이 털 뭉치이다.어찌나 수줍어 하는지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구옥(舊屋)을 리모델링 하고 충주 호수를 전경으로 날아갈 듯한(?) 카페로 변신한 집에서 만난 주인공이다.뷰 맛집에 살고 있는 아이여서 그럴까, 두 눈에 고요한 호수를 담고 있다.
아무튼 설 바카라가 길어서, 명절 일주일 전부터 우리는 'Pre-holiday'를 즐겼다. 노량진 수산 시장에서 요즈음 제철이라는 목포 갈치를 직접 공수해 온 것이다. 명절 일주일 전 수산시장 풍경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굴비, 홍어, 문어, 대게, 횟감 생선으로 축제 현장이 따로 없다. 그리고 꼭 일주일이 지난 바카라 첫날부터 우리는 북촌 한옥 마을에 입성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언덕 꼭대기를 올라 대사관 밀집 지역을 지나갔다. 고스란히 서울의 여백으로 보존된 모습이다. 마을 전체가 놀이터로 조성된 분위기에 따라 우리는 타로 역술인 가게까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신선한 과일 향이 스며든 향수를 쇼핑하고 맛집 근처 맛집을 섭렵했다. 걷다가, 먹다가, 웃다가 집에 돌아왔지만 쉴 시간도 없이 프렌즈 스크린 예약자 명단에 사인을 마친 후에야 바카라 첫날을 마감한다.
다음날 아침 아이스 박스에 명절 음식을 가득 충전해서 시댁으로 향했다. 양가 부모님들이 연로해지셔서 예전에 함께 했던 나들이 길이 우리들만의 예배로 남겨진다. 남편 초등학교 시절 소풍명소였다는 <용담사에 들렀다. 용원 저수지 길을 따라 둑방을 지나서 오솔길 끝에 아담한 산사가 자리잡고 있다. 고즈넉한 7층 석탑이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눈 덮힌 오솔길을 걸으며 작은 아이의 눈망울로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읍내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뽑아 오기로 했다. 하루 전날 쌀을 씻어서 불려 놓았다. 급히 오고 갈 때에는 생략할 수 밖에 없는 과정이다. 명절 바카라가 길어서 가능한 일이다. 인심 좋은 방아간 주인에게 쌀을 맡기고 근처 다방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궁전 다방', 70년대 영화에 나올 법한 세트장이 아닌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시간의 울림에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가래떡 완성 시간에 맞추어 그 자리를 떠난다. 함박눈들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어느정도의 눈이 내릴 것인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명절을 장식할 만한 눈부신 옷자락에 불과했다.
다음날 아침 상쾌하게 창문을 열어 보았다. 온 세상이 눈에 잠겨있다. 집 울타리 삼분의 일 높이까지 눈이 쌓였다. 집 앞에 세워둔 자동차가 이글루로 변신해 있다. 우선 집 주변에 쌓인 눈을 치우고 또 치웠지만 제설 작업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고립될 수 있다는 예감! 일기 예보는 오늘도 하루 종일 눈이 쌓인다고 말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3박4일 나들이를 2박3일로 줄여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고 조심스럽게 고속도로에 들어선다.
무사히 분당 집에 도착한 우리는 평온한 휴식을 하고 다음날 아침 서을 친정으로 발길을 옮긴다. 일년 만에 만난 오빠네 가족들, 미국에서 다니러 온 형부와 반가운 시간을 함께 했다. 내 마음 속에는 연로한 부모님을 챙기지 않는 형제 자매에 대한 회의가 있었지만 각각 부산과 미국에 거주하는 그들의 거리감이 우선 고려되었다.나 혼자 부모님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5대 희극이 민감하게 교차하는 설 명절 바카라를 지냈다.
<자유기고가 : 이체리